리뷰) 알베르 카뮈-시지프 신화

시지프 신화

문득 알베르 카뮈의 시지프 신화 책 리뷰도 끄적이면서 쓰면 좋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철학책… 도전…!

알베르 카뮈는 철학자이다. 시지프스 신화, 이방인, 적지와 왕국, 결혼 여름 등의 책을 쓰셨고, 그 중에서 아마 이방인 이라는 책으로 알려져 있지 않을까라고 생각한다.

우선, 알베르 카뮈가 살던 시대의 배경.

아무래도 역사적 배경을 보면 좀 더 해당 작품을 이해하는 게 수월하다. 저 책만 읽어서는 도무지… 이해하기 힘든 철학책… (나만 그럴 수 있다…)

카뮈는 1913년과 1960년대를 살았던 지성인인데 이 시대에는 양차 세계대전이 끼여있다. 종전과 더불어,

분열, 대립, 냉전, 불안으로 가득찬 혼란의 시대였고.

이전까지는 그럭저럭 미학이라던가 행복 추구, 낙천적인 휴머니즘을 이야기했을 수도 있는데 전쟁를 겪는 세대다 보니 아무래도

허무, 그리고 실존주의, 새로운 휴머니즘이라는 용어가 많이 대두되었던 시대였다.

그 중 카뮈와 관련해서 자주 언급된 건은 ‘부조리’

부조리 라는 단어는 카뮈의 작품 곳곳에 나온다. 그 중 하나가 시지프 신화에서도 등장한다.

카뮈는 부조리란 세계의 두꺼움과 낯설음이라고 말한다.

부조리란 이 세계가 비합리적이라는 것을 거부하고 명확한 것에 닿으려고 하는 인간의 필사적인 열망과 비합리의 맞대면이라고 한다.

시지프 신화

이런 부조리한 세계를 인식한 인간은 단번에 이 세계에서 이방인이 되어 버린다.

시지프 신화의 시작에서는 이렇게 시작한다. 가장 중요한 철학적 질문은 죽음. 즉 자살이다.

인생이 살 만한 가치가 있는가 없는가 하는 것을 판단하는 것. 이것이 철학의 근본적인 질문에 대답하는 것이다

시지프 신화

그리고 뒤에 관련해서 장황하게 자살과 부조리에 대한 글들이 나온다.

우리는 생각하는 습관을 얻기 전에 살아가는 습관을 지니고 있다.

하지만 매일매일 조금씩 죽음으로 우리를 끌어넣는 이 시지프 신화의 세계 안에서 살고 있다.

시지프 신화는 시지프 라는 인간이 신에게 끊임없이 바위를 산꼭대기까지 굴려올리는 형벌을 받았다는 내용의 신화이다. 산꼭대기까지 바위를 올려놓아도 바위는 다시 산 아래로 추락하고, 또다시 산꼭대기로 바위를 굴려올리고 하는 과정. 무익하고 희망 없는 일이라고 신들이 생각해서 형벌을 내린 이야기.

기상, 전차, 사무실 네 시간, 식사, 전차, 네 시간의 일, 식사, 잠, 그리고 월, 화, 수, 목, 금, 토.

결국 죽음으로 다가가는 육체의 결말.

시지프 신화의 맨 마지막 페이지는 카뮈는 이렇게 말하고 끝난다

행복한 시지프를 상상해보아야 한다

신이 내린 형벌에도 시지프는 끊임없이 바위를 들어올리고, 그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것이 좋다고 판단한다.

카뮈의 작품에 ‘신’ 이라는 단어를 보면,

인간에게 자유가 없다면, 전지전능한 신이 인간의 악에 대해서 책임을 져야 하고, 그런 게 아니라면 우리 자신에게 자유가 있고 책임이 있다. 따라서 신은 전지전능하지 않다(p.80)

이와 같이 카뮈가 보았을 때는 신 역시 부조리하다고 보기 때문이다.

신으로부터 인간이 쟁취해야 할 부분이 독립, 인간의 의지라고 한다.

카뮈의 작품 중에 내가 좋아하는 게 적지와 왕국에서 나오는 요나의 고래뱃속 내용이었다. 요나가 고래에게 삼켜졌을 때와 같이 다락방에서 꼼짝하지 않고 자신의 운명을, 별을 되찾기 위해서 고군분투할 때.

요나는 인간들이 내는 그 아름다운 소음에 귀를 기울이고 자신의 별을 되찾는다 (적지와 왕국)

인간은 신들에 대한 멸시, 죽음에 대한 증오, 그리고 삶에 대한 열정은 아무것도 성취할 수 없는 일에 전 존재를 다 바쳐야 하는 형용할 수 없는 형별을 받았다.

카뮈의 과제는 부조리한 세계를 인식해서 이방인의 눈길이 되어, 인간인 것, 인간의 존재, 실존을 되찾는 것. 이라고 생각한다.

카뮈는 시지프는 바위를 굴림으로서 그가 영원을 바라거나 도피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 세계에서 주인이 되었다고 말했다.

예전에 신이라는 건 무력감을 극복하기 위해서 인간은 신을 필요로 한다 라는 글을 본 적이 있다. 카뮈는 이 무력감이라는 것마저 인생은 살만한 것이라고 외칠 수 있는 증거가 된다고 한다. 부조리함을 똑바로 바라보고 자신이 주인이 되는 것. 결말을 알고 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 바위를 굴리는 어떤 비범함.

마무리

사실 읽기 난이도… 참 까다로운 책이다. 다시 읽어도 솔직히 모르겠다. 적지와 왕국이 좀 더 와닿는 것 같다.

요나 뱃속 이야기가 더 흥미를 불어일으켰던 것 같다. 잊혀진 언어라는 책에서 에리히 프롬이 해석한 것도 떠오르면서. 요나는 신의 목소리를 듣고 사람들에게 말해야 하는 예언자였지만, 자신이 해야 할 일에서 도망치려고 해서 결국 고래에게 먹혔던 것을. 비현실적인 내용처럼 보이지만 이건 모두 상징 언어로 쓰여져 있다고 말했던 내용과 겹쳐보이면서.

결국 자신의 별에 따라서 살아가야 하고. 그럴 수 밖에 없는 인간에 대해서 좀 더 생각했던 것 같다.

누군가 구토 란 책을 읽고 도대체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 라고 말해줬던 것도 생각난다. 실존주의 철학자 중의 한 명이 쓴 책. 구토… 읽다가 포기했었던 그 책.

철학책이나 문학 작품은 신기한 부분이 뭔가 메마르게 될 때 채워주는 역할을 한다고 생각한다. 경제, 정치, 실용 기술 등과 관련된 책도 아니라서 일상 생활과 정말 동떨어져 있다고 생각이 되긴 했지만… 무언가 메마르다는 느낌이 들 때, 버지니아 울프의 글이라던가. 파스칼의 팡세 라던가. 잠깐씩이라도 읽었던 글이 그래도 등불과 같이 지성을… 이성을 밝혀준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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